11번가Book


특명 37.4℃로 열을 올려라 B급 꽁트

로비에 요상한 물체가 들어섰다.
열화상카메라라는 것이다.
스페인에서 발생한 이번 신종인플루엔자 H1N2C 덕분에 
삼미그룹의 분위기는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고 있다.

처음에는 그저 포스터 한 장이 전부였는데
층별 출입구마다 손 세정제가 달리고
매일 신종바이러스 예방과 의심환자 격리조치에 관한 전체공지메일이 뜨고
개인 손 세정제가 지급되고
지하 아케이드에 임시 의무실이 생기고
드디어 열화상카메라까지 설치된 것이다.

세계 사망자 수가 52만 명을 돌파한
어제 날짜로 WHO는 이번 신종바이러스의 대유행을 선언했다.

그리고 열화상카메라를 설치하자마자 수혜자 한명이 생겼다.
아침부터 몸살이 오는 것 같다고 낑낑 거리던
삼미상사 총무팀 이재훈 대리가 그 주인공이다.
담배를 피우겠다며 나갔다 들어오는데 로비의 보안 요원이 제지하더란다.
당시 체온이 37.5℃였다는데
바로 의심환자로 분류돼 출입카드를 뺏기고 귀가조치 당했다고 한다.
의심환자는 감염이 안 되었다는 확인서를 받아오더라도
1주일간 강제 격리된다는 그룹의 원칙 때문에
그는 1주일의 휴가를 얻게 된 것이다.

    '역시 총무팀은 정보가 빠르군. 
     어떻게 열화상카메라가 설치되는 걸 알고 열을 올렸대?'


삼미상사 구매팀 김민석 대리는 은근히 배알이 꼴렸다.
그는 이재훈 대리가 절대 신종바이러스 환자가 아니라고 믿고 있었다.


    '잠깐, 격리조치 기준 체온이 37.4℃라고?
     그러면 딱 1도만 올리면 되는 거잖아. 여름 휴가도 제대로 못 쉬었는데 나도 한번 쉬어보자'

이렇게 김 대리의 열 올리기 작전은 시작된 것이다.

    '오호라, 운동을 하면 체온이 올라간다고?
     그렇다면 내일 출근할 때 청담역에서 내려서 전력질주를 해야겠군.'


하지만 네이버에서 검색한 얄팍한 정보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청담역에서 삼미그룹이 있는 학동사거리까지 전력 질주를 한다고
체온이 37.4℃가 될 리는 만무하지 않는가.


열올리기 첫번째 작전은 괜히 헛힘만 쓰고 만 꼴이다.
그저 숨만 헐떡이고 얼굴만 벌개졌을 뿐.


    '아, 맞다. 중학교 때 조퇴하려고 쓰던 비법이 있었지'

김 대리가 생각한 비법은 고개를 푹 숙여 머리쪽으로 피가 몰리게 하는 것이었다.

    '이제 슬슬 담배나 피우러 가볼까나'

10여분을 고개를 처박고 난 다음, 약간 어질한 기분을 느끼며
김 대리는 열화상카메라 앞에 섰다.
벌개진 얼굴에 약간의 미열, 이쯤이면 선생의 손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상대는 열화상카메라, 나름 최첨단 기기이다.
두번째 작전도 실패.


    "야, 김대리 그 가격변동 보고서 다 작성해 놨어?
     오늘따라 더 뺀질 거리네, 지금 담배 피울 시간이 어딨어?"


김영권 과장의 지청구에 김 대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내일까지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꼭 37.4℃로 올려야 되는데...'


김 대리는 보고서를 작성하는 대신 몸을 극도로 피곤하게 만들기로 했다.
자료를 모으는 척 하며 쓸 데 없이 문서실에 쳐 박혀 계속 서 있기 작전이다.
조금이라도 면역력을 떨어뜨리기 위해 점심도 거른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오늘 하루만 고생하자.
     보고서는 무슨... 김 과장, 뺑이 한번 제대로 쳐보라고..'

허기 지고, 다리도 욱신거리고
이제 정말 열이 오르는 듯 했다.
하지만 김대리는 섣불리 로비로 나가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번 작전은 보다 완벽을 기하는 것 같다.


이윽고 오후 5시가 되었다.
김 과장이 보고서의 진행정도를 묻는다.
김 대리가 아직 자료 정리가 끝나지 않았다고 얼버무리고


    "내일 오전 11시까지 부장님 결제 받아야 해. 오늘 집에 갈 생각 하지마."

김 과장은 엄포를 놓는다.

    '아, 재수 없는 놈. 같은 말을 해도 꼭 지랄 같이 해요.
     내일 보자고? 난  내일부터 휴가네 이 사람아...'


김 대리는 보고서 작성은 미뤄놓고 계속해서 문서실을 서성 댔다.
극도의 피로감을 느꼈을 때 시계를 보니 이미 11시.
퀭한 눈에 이물감도 느껴지고
구름 위를 떠 있는듯 한 몽롬함도 느껴지고
이만하면 됐다 싶은 김 대리.


집으로 돌아 온 김대리는 내일은 기필코
열화상카메라를 속이겠다는 일념으로 찬 물에 샤워를 하고
창문을 활짝 열어 놓은 채 속옷만 입고 잠에 들었다.


    '으, 추워.., 이제 목도 따끔거리고 으슬으슬하고.. 
     하지만 참자, 뭐 하루쯤 푹 쉬면 괜찮아질테니까'


이른 새벽, 추위에 눈을 뜬 김 대리는 이미 꾀병 수준은 넘어선 듯 하다.
어제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체온을 재 보았더니 37.6℃.


    '드디어 성공이다. 일주일 동안 뭘 하고 놀지?'

깨질 듯 아픈 머리와 묵직해진 몸을 이끌고 출근하는 길,
김 대리는 그래도 일주일의 휴가를 생각하느라 즐겁다가


    '아니지, 아니야. 괜히 기분이 좋아지면 열이 내릴 수도 있어.
     나는 아프다, 아프다, 아이고 죽겠다...'


자기최면을 걸면서 도착한 회사 로비.

    "저기 잠시만요,"

아니나 다를까 보안요원이 김 대리를 막아선다.
짐짓 안 아프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는 김 대리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퍼졌다.


삼미그룹 임시 의무실에서 3번에 걸친 체온검사 결과는
37.5℃, 37.6℃, 37.9℃
의심할 여지 없는 신종바이러스 의심환자 판명이다.


김 대리는 득의 양양하여 김 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다, 알아... 자식, 운도 좋아요... 보고서는? 그럼 자료는?
     뭐, 이 자식... 너 돌아오는 날 보자.. 암튼 몸조리 잘하고"

이미 회사에선 김 대리에 대한 소식이 다 퍼진 듯 했다.
우선은 병원으로 가야했기 때문에 병원으로 향하는 길,
김 과장으로부터 급한 전화가 왔다.


    "야, 김 대리... 몸 조리 잘 해라, 지금 막 연락 왔는데,
     총무팀 이재훈 대리 있잖아, 확진 판정 받자마자 뇌사상태에 빠졌대.
     그 뭐냐, 안티플루민인가, 그거를 온 몸에 도포해야하는데
     시기를 놓쳤대나 뭐래나... 너, 이재훈 대리랑 자주 다녔잖아.
     아무래도 너도 그런 거 같으니까 바로 회사지정병원 있잖아.
     제일병원, 그쪽으로 가라. 인사팀에서 다 말해놨다고 하니깐..."


    '이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인가? 뭐가 어떻게 됐다고,
     난 그냥 1주일만 쉬면 되는데, 말도 안 돼....'



    "며칠 무리를 해서 그런지 면역력이 많이 떨어져 있는 상태입니다.
     아마 그래서 바이러스가 곳곳으로 퍼진 것으로 보이고요,
     다행히 안티플루민 전신도포 시기를 놓친 것 같진 않습니다만
     우선 지켜봅시다."

방독면을 쓰면서 웅얼웅얼거리는 의사의 말에
김 대리는 더더욱 혼란스럽다.


    "생명엔 지장이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만 후유증이 있을 것 같습니다.
     다른 장기에 침투한 바이러스는 크게 신경을 안 써도 되는데
     H1N2C 특성상 부비동에 침투하면 만성 목인비증(木人鼻症)이 온다는
     보고가 있어서 그게 좀 걱정이군요. 우선 지켜봅시다."


여전히 방독면 뒤에 숨어서 웅얼거리는 의사의 말은
김대리가 도무지 이해할 수준의 것이 아니다.


강제 격리 조치 25일째,
김 대리의 주치의는 '우선 지켜봅시다'란 말밖에 모르는 듯 하다.

강제 격리 조치 87일째.
드디어 김 대리는 종이 한 장을 들고 격리병실에서 나올 수 있었다.


    <H1N2C바이러스에 의한 독감은 완치됐음을 확인해드립니다.
      후유증으로 목인비증(일명 피노키오신드롬)이 의심되는 바입니다.>




꽁트B의 원고료 앵벌이
클릭 한번 도와주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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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불탄 2009/09/19 00:16 # 삭제 답글

    없는 병을 키웠던 걸까요?
    잔뜩 긴장하고 있던 다리에 힘이 풀린 듯한 느낌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 꽁트B 2009/09/19 01:11 #

    이 꽁트를 쓰고 난 후에 고위험군이 아닌 환자가
    신종플루로 뇌사상태에 빠졌다는
    기사를 읽고 깜짝 놀란 기억이 있습니다.
    허접한 글에 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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