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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 8개월, 민여사의 화려한 데이트 B급 꽁트

  '이 인간이 미쳤나? 주말아침 식전 댓바람부터 뭔 바람이 분 것이여?'

  민 여사는 아침부터 허둥대는 남편이 자못 의심스럽다. 결혼 생활 13년 8개월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하다.

  "우리 내일 놀러 갈까?"

  분명 어제밤 침대맡에서 남편이 한 말이긴 하지만 또 공수표 날린다고 베개로 한 방 먹임과 동시에 이내 사라진 약속이라 생각했는데 남편이 벌써부터 부산을 떨고 있는 것이다.


  "야, 이 인간아, 그렇게 무식하게 밥을 얹으면 김밥이 말리냐? 어휴, 저 어질러 놓은 것 좀 봐, 내가 미친다. 당신은 그냥 가만 있는 게 도와주는 거라 몇 번을 말하냐. 저, 화상..."


  언제 일어난 것인지 벌써 밥을 다 해 놓고 김밥을 하겠노라며 주방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은 꼴이 귀엽다는 생각도 잠시, 민 여사는 예의 지청구를 늘어놓는다.

 '아차, 저 인간, 또 욱 하겠네. 또 뻔한 레퍼토리 시작이겠군. 간만에 호사하나 싶었는데 이 입방정.
아니야 왠지 꺼림칙하게 호사하느니, 그냥 지지고 볶는 게 편하지, 뭐.'


  평소같으면 벌써 3~4옥타브를 올라갔을 남편의 목소리가 평온하다. 아니 오히려 실실 웃기까지 한다.

 '역시 뭔가 있어. 저 인간 주변머리에 바람 피울 리도 없고, 또 주식 사고 친 거야. 어휴 속 터져...'

  "너 뭘 잘못했어? 또 주식 했냐? 바른대로 불어."

이쯤이면 터져도 벌써 터졌을 남편이지만 오늘은 확실히 다르다.

  '어라, 이 이간 봐라. 정말 무슨 일이 있긴 있구먼.'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남편의 모습에 민 여사의 불안감은 점점 커져간다.

  '도대체 뭐야?'

  이미 13년 만의 가족 나들이에는 관심 없었지만 민 여사는 더욱 남편의 꿍꿍이 속을 알아내기 위해 골똘한다. 이런 민 여사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편은 서툴지만 차근차근 나들이 준비를 해 간다.

  "자, 김밥은 이제 됐고... 또 뭐가 필요한가 보자... 아, 뭐하셔? 이제 슬슬 나갈 준비 해야지, 나드리 준비는 내가 다 할 테니 자기는 씻고 옷만 입으면 된다니까... 상희랑 상욱이도 좀 깨우고..."

 "아, 그러니까 도대체 왜 이러냐고? 뭐가 구리니까 이러는 거 아니냐고? 바른 대로 말하면 용서해줄 테니까 얼른 불어..."

  "아, 이거 좋은 가장 되기 힘들구먼. 허허, 그냥 나도 좋은 아빠, 좋은 남편 한번 되어 볼려고 그런다니까..."
 
  '말도 안돼.'

  결혼 한 지 13년 8개월 동안 그 흔한 바캉스마저 갈 여유가 없던 남편이다. 그뿐인가 모든 대화는 3분 안에 고성으로 마무리짓는 사이가 아니던가. 매달 통장에 찍히는 1,295만원이라는 숫자가 아니었다면 민 여사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결혼생활을 일찌감치 끝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이렇듯 민 여사가 닥달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10년을 한 결 같이 집안 일엔 무심했던 목석남편아니었던가.

  민 여사는 계속 잔소리를 늘어놓기도 하고, 부부싸움 레퍼토리로 툭툭 찔러도 본다. 가끔 미간이 찌푸러지긴 하지만 남편은 이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나들이 준비에 열중한다. 

 "도대체 어디로 갈 건데?"

  뭔가 찜찜하긴 했지만 민 여사는 행선지를 물어보며 남편의 나들이 계획에 동조하는 척 하기로 한다.

 "오산에 수목원이 생겼다네, 숲을 거닐면서 피톤치드 좀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지 않을까? 숲에서 가족끼리 도란도란 김밥도 먹고 말야, 어때 좋지?"

 '수목원? 생각하는 꼬라지하고는, 아무튼 정말 재미 없는 인간이야. 지금 수목원을 간다고 하면 내가 좋아하겠니, 애들이 좋아하겠니,'

  끙, 소리가 절로 난다. 참으로 해맑은 표정으로 나들이 계획을 말하는 남편을 보니 약간 측은한 마음마저 든다. 남편이 정말 순수하게 가족들에게 미안해서 그럴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설핏 들기도 한다.

  "수목원이요? 에이, 미리 말씀 하시지, 난 오늘 약속 있어서 못 가요."

  "나도, 나도. 와, 엄마 좋겠네. 간만에 아버지랑 데이트도 하고,"

  "거봐, 애들도 안 간다고 하지. 하다 못해 에버랜드라도 간다면 애들이 약속 핑계 대겠어? 무슨 사람이 하는 일이 다 그 모냥이야?"

  아이들까지 나들이에서 빠지겠다고 하자 남편의 표정이 조금 복잡해진다.

  "그래, 너희들도 다 스케줄이 있는데 아빠가 혼자만 생각했구나, 미안하다."

  '오늘 왜 이래? 진짜. 잠깐 이 인간, 지지난 주였던가, 건강검진 받는다고 했었잖아.'

  남편의 사과는 조금 뜬금 없다. 이제 민 여사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사람이 죽을 날이 다가오면 변한다는데 남편이 그런 것 아닌가 싶은 것이다. 애초에 사랑, 정 따위의 것들로 같이 살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10년 넘게 살아온 남편이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다면,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민 여사는 눈 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뭐, 별 수 없지. 그래, 십 몇년 만에 우리 남편하고 데이트나 해볼까?"

  애써 태연한 척, 민여사는 남편의 팔짱을 끼며 오늘 처음으로 남편에게 맞장구를 쳐 준다.

 "그, 럼, 그, 럴, 까,"

  민 여사의 팔장을 천천히 풀며 또박또박 말하는 남편의 대답, 역시 그런 것 같다. 과연 남편과 함께 할 시간은 얼마나 남은 것일까? 그날이 바로 내일이나 모레가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민 여사는 서둘러 외출 준비를 한다.

  "이제, 솔직히 얘기해 봐. 어디야? 어디가 안 좋은 거야?"

  남편의 세단에 올라타며 민 여사는 지그시 물어본다. 못 들은 척 하는 것일까, 남편은 대답이 없다. 평소 같았으면 자신의 말이 잘린 것에 벌컥, 화를 낼 민 여사지만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간다.

 "어, 기름이 없네. 가까운 주유소가 어디있더라."

  남편 역시  평소와 다름 없이 행동하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굳이 수목원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는 것이나, 주유를 해야겠다고 미리 말을 하는 것이나 역시 뭔가 어색한 것만은 분명하다.

  쿵.-
  셀프주유소에서 주유를 다하고 다시 시동을 걸려는 순간, 뒷차가 살짝 들이받았다. 

  "아니, 시동도 아직 안 걸었는데 들이밀면 어떡해? 야, 야, 이리 안 나와? 이 자식이..."


  민 여사는 흠칫 놀랐다. 집에서만 목소리를 높였지 밖에서는 샌님 같은 줄 알았던 남편이 집에서처럼 폭발하고 만 것이다. 남편의 욕소리가 점점 커진다. 이제는 아예 난동수준이다. 주유소 점원들이 달려나오고, 주변의 승용차에 탔던 사람들도 달려나오고,...

  민 여사는 급히 차에서 내렸다.

  "죄송해요, 이 사람이 아파서 그래요. 죄송합니다."

  민 여사는 연신 사과를 하며 남편을 뜯어 말리기 시작했다. 간신히 진정한 남편이 머쓱했는지 차에 오르면서 소동은 일단락되었다.

  '아, 얼마나 힘이 들면 원래 조용한 사람이 이럴까?'

  민 여사는 운전하는 남편을 힐끔힐끔 보며 동정심을 키우고, 차 안에서는 어색한 침묵이 계속 흐른다. 차는 어느덧 오산 수목원에 주차장에 들어섰다.
남편의 휴대전화 벨이 울리기 시작한다.
번호를 확인한 남편은 민 여사에게 멀찍이 떨어져 전화를 받는다.

 "어, 최변호사. 그래. 알아봤어? 아니라고? 그래? 아, 다행이군.
 그래, 알았어, 알았어. 잘 해야지. 요즘 이혼하면 개털 된다는 거 다 안 다니까.
 그래서 지금 아내하고 간만에 나들이 나왔어.
 이제, 대충 비위 좀 맞춰주면서 살아야지. 
 힘들긴 하더라고, 그래서 엉뚱한 데서 폭발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따로 주머니 챙긴 것도 없는데 어쩌겠어. 그래그래..."


  남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친구인 최 변호사 옆 사무실에서 이혼 상담을 한 여자가 민 여사가 아니었다는 전화였다.

  어쨌든 민 여사의 화려한 데이트는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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