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번가Book


착한사람 문성현을 찾아서 B급 꽁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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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위 광화문 글판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책방을 갖고 있는 보험사에서 서울시민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담은 글판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꼭 광화문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 광화문 글판이라는 것을 주로 강남역사거리와 영동시장사거리 중간쯤에 있는 사거리에서 본다.
 그 사거리는 한 동안 제생사거리로 불렸다. 하지만 제일생수가 망하고 그 옆에 빨간벽돌로 된 큰 빌딩이 들어서자 이내 빨간벽돌사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빨간벽돌사거리의 수명은 그리 길지 못했다. 사거리에 9호선 신논현역이 들어서자 시에서는 재빨리 표지판을 바꿨다. 이제 사람들은 그곳을 신논현사거리라고 부른다.

 이런 명칭의 변화는 특히 택시를 탈 때 종종 난감하게 만든다. 영동시장사거리도 내가 편하니까 그리 부르는 것이다. 이미 논현역사거리로 바뀐지 오래이다. 따라서 택시를 탈 때 기사의 나이를 가늠하는 것이 중요하다. 초로의 택시기사에게 신논현사거리를 행선지로 말하면 못 알아듣기 마련이다. 때로는 빨간벽돌사거리라고 말해도 모른다. 제생사거리요, 라고 확인사살을 하면 그제서야 알아듣고 미터기를 올릴 것이다. 하지만 이도 틀릴 경우가 있으니, 늙은 택시기사라 하더라도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다면 새로운 이름을 불러주는 편이 낫다. 사거리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이 놈의 서울은 비슷비슷한 이름의 사거리가 너무 많다.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가 있는 학동역사거리에서 거래처가 있는 학동사거리를 택시 타고 갈 때면 거의 매번 웃지 못할 코미디가 연출된다. 하여 길을 제대로 설명해주다보면 어느새 사거리의 홍수에 빠져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런 식이다. 그 도산공원사거리하고 청담사거리 가운데요, 아니 그러니까 강남구청역사거리하고 갤러리아사거리 중간 말입니다....

 또 엉뚱한 길로 빠졌다. 내가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사거리의 이름 따위는 아니었는데, 잠시만 기다려주길 바란다. 좀 있으면 기억이 돌아올테니, 꼭 돌아올 것이다. 여유 갖고 기다리다 보면 애초의 주제에 대해 듣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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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 처음 나는 광화문글판에 대해 이야기하려 했다. 것 봐라. 내 기억력은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다. 다시 광화문글판으로 돌아와서, 이 글판은 IMF시절에 고은선생의 글귀로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모여서 숲이 된다, 나무 하나하나 죽지 않고 숲이 된다... 대충 이런 글귀였던 것 같다. 아무리 기억력이 온전하다하더라도 세세한 것까지 하나하나 기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적당한 선에서, 내용을 알 수 있을 만큼만, 딱 그만큼만 기억하고 있으면 완벽한 기억력인 것이다. 됐다, 자기최면은 이정도면 족하다. 언젠가 그 글판에 왜인(倭人)의 하이쿠가 떡하니 올려져 있어 정권교체를 실감한 적이 있었는데 그 다음엔 지나인의 글귀가 적혀있었다. 아마 글로벌한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는가 보다고 오해를 풀어주기로 했던 기억이 있다. 이싸(小林一茶)에서 이사(李斯)로, 글판지기도 꽤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번달이 들면서 새로 바뀐 글귀가 오늘 출근길에서야 눈에 들어 온 것이다.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
 아, 낯익은 글귀인데, 누구의 시더라. 기억을 더듬어도 언뜻 떠오르지 않는다. 현판 밑부분에 작은 글씨로 쓰여진 장석주란 이름을 보지 않았더라면 아마 아직도 누구 시인지 고민하고 있었으리라. 장석주, 란 이름이 입력되자 나의 완벽한 기억회로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럴 때면 종종 뇌단현상(腦端現象)이 일어나곤 하지만 곧 정상화되니 걱정하지는 않는다.

 장석주, 장석주라... 새세뜰? 아니지 그건 말라깽이 황선생님의 대표작이잖아. 아, 뭐더라?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아니할 때? 아닌 것 같은데...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맞지. 그거지? 역시 난 녹슬지 않았어. 다행히 햄버거에 관한 명상하고 헷갈리지 않았어. 그런데 새떼들에게로의 망명에 대추한알이라는 시가 있었나? 왠지 톤앤매너가 맞지 않는 듯 한데... 그 장석주가 이 장석주가 아닌가? 

 기억회로의 작업은 신논현역에서 회사까지 오는 동안 내내 진행되었지만 이렇다할 출력물을 뽑아내지 못한다. 이러면 곤란하다. 지난 주도 김소진 유고집, 착한사람 문성현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가. 진실을 찾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연구하다가 결국 프리젠테이션 준비를 제대로 못해서 최 국장에게 경고 받은 일을 생각하면... 나의 완벽한 기억력이여, 어서 돌아와라. 이제 나는 출근하여 업무를 봐야 한다. 그렇다고 지식in에 물어보는 일 따위는 용납할 수 없다. 온전히 완벽한 기억력에 기대서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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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대학시절 마지막으로 읽은 소설집은 김소진의 유고집, 착한사람 문성현이었다. 적당한 선에서 내용을 알 수 있을 딱 그 만큼만의 완벽한 기억력에 따르면 매우 따뜻했던 단편으로 기억한다. 아마도 그 비슷한 시기에, 내 절친한 친구의 유년시절이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신내동 재개발 현장을 다녀와서 더더욱 감회가 남달랐다는 기억도 접수돼 있다. 

 얼마전 책장정리를 하다 우연히 발견한 김소진의 유고소설집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어떻게 책 제목이 바뀔 수가 있고 주인공 이름이 바뀔 수가 있단 말인가. 눈사람 속의 검은항아리,라고? 대체 이 들어본 적도 없는 제목은 무엇인가. 그 착한 문성현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착한사람 문성현은 내 기억이 만든 허구란 말인가? 내가 아무리 뛰어난 고급독자라 해도 어찌 새로운 소설을 구상할 능력이 된단 말인가? 도대체 말도 안 된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는 모든 게 뒤죽박죽이다. 도대체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다. 장석주, 그도 마찬가지다. 분명히 읽은 기억이 있다. 한때 그에 관한 레포트도 작성한 적이 있단 말이다. 이건 마치 박찬욱의 오!수정이 현실 속으로 뛰어든 느낌이다.

-쓸데없는 주석, 작자(作者)가 스포일러-
장석남과 장석주.
윤영수의 착한사람 문성현의 발간일 1997년 5월 20일.
김소진 유고집,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 발간일은 1997년 5월 24일.

그리고 꽁트B의 실화.
2001년 사우스파크란 애니메이션에 열광, 열광, 열광하여 자신의 일기장을
싸팍으로 도배한 적이 있음.
2006년 옆자리의 동료직원이 보는 사우스파크 TV시리즈물을 보곤 너무 재미있다며
몇 주일을 싸팍에 빠져 살지만
2001년에 봤던 사우스파크는 전혀 기억하지 못함.
2009년초 우연히 그때 썼던 일기장을 보곤 대폭소하며 쓰러짐.



꽁트B의 원고료 앵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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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루스 가든 - 매일 매일 한 편의 글쓰기.

덧글

  • 하르 2009/09/13 10:28 # 삭제 답글

    여긴 독자가 나밖에 없는가? ㅋ 어째 덧글이 없냐? 장석남과 장석주, 김소진과 윤영수를 헷갈리다니... 교묘하다. 네 머리는. 장석,이라는 글자가 똑같이 들어가는 시인 둘도 그렇고, <착한 사람 문성현>은 하마터면 나도 김소진일 거라고 생각할 번했다. ㅍㅎㅎㅎ
  • 꽁트B 2009/09/14 09:04 #

    그러게나 말이다. 그렇게 스팸문자를 뿌려대는데도 별로 인기가 없다. 그래도 그냥 방콕형 블로그로 가려고 한다. (그래도 육아블로그는 꽤나 사람이 들어온다 말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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