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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트B의 20세기 작품] 신내동 詩 혹은 B급의 낙서


신내동


배꽃이 흐드러진 날
꽃잎마다 소녀의 얼굴 스며 있어
온종일 배밭을 굴러 다니던 아이
동네 담벼락에 석필로 소녀 이름 짙게 새기곤
친구들이 툭툭 찔러도
아무 대꾸 않고 버슷하게 서 있었지
하나에 십 원하는 돌배 두어개 사서
한 입만 베어물고서는 배실배실

좁은 동네 어귀에 낯선 차들 몇 대
아이는 마냥 신기했지만 엄마는 한숨만 내쉬었지
배꽃이 허옇게 질러 자지러지던 그 해
배꽃들은 잘 있는지 몰라

그 아이 장성하긴 했는데
키는 매 그 모양이고 수염만 덥수룩했다지
하얀 꽃잎 난분분한 계절이면 아무 일도 못하더니
결국엔 야트막했던 언덕배기로 달려 갔다지
하얀 꽃잎 잦아든 자리마다 잿빛 아파트만 서 있어
입술 꼭 개물고 돌아설 때였다나
두껍게 회칠한 소녀와 마주쳤다지

장바구니 들고 총총 걸어가는 그녀를 스쳐 보내고
망부석마냥 꼼짝않고 서 있다가
갑자기 키가 한 자나 더 커졌다는데




벌써 시집을 두권이나 낸 게으른 시인 김근은
유년시절을 신내동에서 보냈다고 했고,
대학시절 나는 그 근방인 묵동에 살았다.
하루는 그와 함께 유년시절의 궤적을 반추하자며
신내동을 간 적이 있다.
그가 살던 동리는 골목골목 그대로였지만
이미 택지지구 조성을 위한 철거가 결정되어 있는 상태였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
다시 찾은 신내동은 중랑구에서 보기 드문 아파트 단지로 탈바꿈해 있었다.
그때의 감회를 담은 시인데...

암튼 1996년에서 1997년 사이에 쓴 시로 추정된다.
처음에는 분량이 이보다 훨씬 길었는데 퇴고를 하다보니 짧아졌다.
대학시절 누군가 꽁트B는 초고에서 퇴고를 하면 할수록 시가 이상해진다고 말했던 일도 기억난다.

덧글

  • 불탄 2009/09/19 21:45 # 삭제 답글

    저도 글을 쓰는(?: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남들이 뭐라해도 저는 그렇게 글쟁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입장에서 탈고나 퇴고를 하는 경우에 반대적 손실을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술한잔 하고 편지글을 썼는데 아침에 다시 읽어보면 부끄럽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냉철한 이성으로 손을 보게 되면 맛깔스러운(표현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흐름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지요.

    한번 쪽팔림은 짧더라고요. 그래서 전 엥간(?)하면 수정을 하지 않습니다. 그 글을 쓴 그 순간의 감흥을 지금 시점에서 가늠할 수 없다는 "그시점주의자"거든요.

    그리고... 아닙니다.

    이 글... 함축적인 의미를 아주 많이도 담으셨습니다.
    글을 읽는 내내 존경의 염을 가지게 되는군요.
    좋은 글 감상할 수 있어서 너무나 기쁜 날입니다.
  • 꽁트B 2009/09/21 09:17 #

    그 순간의 감정을 해치지 않으면서 더 매끄럽게 거듭다면 참 좋을텐데, (욕심이 큰 건가요?) 쉽지가 않죠?
    늘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불탄님 덕분에 또 힘이 불끈~ ^^
    이번 한 주도 내내 행복한 한 주 되시길 기원합니다.
  • 리버 2009/09/21 11:27 # 답글

    제가 아직 회사 다니면서 월급받던 시절
    중계동에서 살면서 창동역인가, 노원역인가에서부터
    회현역까지 날마다 날마다 땅속을 오고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는 해뜨기전에 땅속으로 들어가서
    햇빛없는 사무실에서 하루종일 보내고
    다시 해가지면 땅속으로 퇴근하던 일상이었습니다.

    회현역 부근의 선술집들이랑,
    차돌배기를 맛있게 구워먹던 뒷골목,
    고갈비에 쏘주한잔 했던 기억들이 생생합니다.

    막 신혼에 혼자 섬처럼 기다리던 아내는
    늘 정류장까지 마중나와
    나의 하루를 묻고 궁금해 하였더랍니다.
  • 꽁트B 2009/09/22 10:21 #

    제 허접한 시로,
    잠시나마 옛추억에 잠기셨다니 제가 다 기쁩니다.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하르 2009/09/23 13:27 # 삭제 답글

    나도 참 눈치가 없지. 그날 돌아오는 길에 시립대 앞 곱창집 골목집에서 소주까지 한잔 진하게 해놓고도 나는 왜 당시엔 이 시가 그날 이후 네가 이 시를 썼다는 사실을 왜 알아채지 못했을까. 그게 왜 내 얘기에서 촉발되었을 거라는 걸 몰랐을까. 흐흐흐. 마구마구 떠오른다. 그 골목 끝에 있던 공중변소, 그때 남아 있던 공터의 스산한 풍경. 그런데, 역시 고친 게 더 안 좋아, 안 좋아. 흐흐흐. 아 그 시절, 우리가 마구 몰려다니며 술 먹던 시절 시가 술술 넘쳐나오던 시절, 금호동과 성대 앞과 그런 곳들도 마구마구 떠오른다.
  • 꽁트B 2009/09/23 16:04 #

    자꾸 옛날 얘기나 하면 지는 거다, 흐흐흐.
    어제 다른 블로그에 민수가 덧글 남겼더라.
    언제 모여서 다들 사욕이라도 한번 해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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