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번가Book


1차원적 인간 B급 꽁트

들어가기에 앞서 본 이야기는 마르쿠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밝히는 바이다. 지난번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그랬듯이 그냥 제목만 따왔을 뿐이다. 그런 어려운 얘기를 하는 것은 꽁트B 깜냥이 아니다. 게다가 요즘처럼 하수상한 세월에 마르쿠제를 소재로 삼을 용기 따위는 더더욱 없다. 그럼 시작~!


 새벽 3시. 아직 정신이 말똥말똥하다. 지난 일주일 동안 쌓인 피로 때문이다. 대체 본부장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덕분에 주7일제 78시간 근무, 이게 어디 사람이 할 짓인가 말이다. 너무 피곤하니 잠이 오질 않는다. 그러다보니 이 생각, 저 생각, 온통 잡생각뿐이다. 어제는 간만에 일찍 퇴근했기 때문에 지각할 수도 없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잠 좀 자야 하는데, 이미 양 오백 마리 이상을 세어 보았다. 이백 마리가 넘어가자 슬슬 회사일 생각이 꼬리를 문다. 아, 출근시간이 10시만 되어도 살만 할텐데... 그런 회사가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직하고 말 것이다. 아, 벌써 3시 20분. 지금부터 잠이 든다해도 고작 3시간이나 잘 수 있을까...

  때르르릉, 때르르릉

  알람소리에 시작하는 차원일의 아침은 여전히 무겁다. 일어나자마자 냉수 한잔을 들이키고 곧 바로 욕실로 향한다. 그에게 아침식사라는 단어는 20년 전에 사라진 말이다. 물론 아침식사를 건너 뛰는 것 때문에 머리, 특히 기억력이 상당히 나빠졌다는 사실은 그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아침식사 때문에 지각을 한다는 것은 무모하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의 소원은 출근시간이 자유로운 회사에 다니는 것이다.


  쏴아아-

  차원일은 벌써 5분째 샤워기를 틀어놓고 그대로 서있다. 그는 온수샤워가 잠을 설친 탓에 굳어진 어깨를 풀어준다고 믿는다. 이러다간 지각인데, 순간 정신이 퍼뜩 들었다. 서두르기 시작한다. 대충대충 목에서부터 발까지 비눗칠을 하고 일어나려는 순간, 쾅-하고 수전에 뒷통수를 찧는다. 본능적으로 손을 갖다댄다. 피가 살짝 비친다. 꽤나 아프다. 오늘도 그에겐 일진 사나운 하루인 듯 하다. 하지만 이 정도로 지각을 할 수는 없는 일, 상처부위를 물로 씻어내고 급하게 샤워를 마무리한다.

  "무슨 소리야, 쾅 소리 나서 와봤는데..."

  "뭐야? 다친 거야?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냐?"

  수전에 부딪히던 소리가 꽤 크게 났는지 그의 아내가 놀라 뛰어 나온다. 걱정하는 아내를 뒤로 하고 서둘러 옷을 입는다. 아내는 계속 채근 하지만 그는 아예 무시한다. 여기서 조금만 더 지체하다간 마을버스를 놓치게 된다. 출근시간의 5분이 얼마나 중요한 지 그는 잘 알고 있다. 급하다보니 옷차림은 영 엉망이다. 자유복장을 해도 괜찮은 회사니까 그냥저냥 넘어가는 것이지 격식을 조금이라도 따지는 곳이었다면 당장 시말서감이다. 깃이 유난히 큰 인디언핑크색의 드레스셔츠에 그레이 스키니 진. 게다가 검은 색 나일롱 양말을 신은 그의 모습에 아내가 또 한마디 거들지만 그는 그냥 뛰쳐나간다.

  "이따 갔다 와서 얘기해. 나 늦었어."

  차원일의 출근 인사는 늘 똑같다. 하지만 한번도 퇴근해서 아내와 얘기한 적은 없다. 도대체 그 얘기는 언제 다 할 것인지. 만약 그가 날 잡고 출근인사 겸 약속을 지키려고 한다면 한달은 족히 걸릴 것이다. 아내는 그게 늘 서운했지만 이해한다고 말하고 다닌다. 하지만 그녀가 온전히 그를 이해해주고 있는 지는 신도 모를 일이다.

  "에헴, 거 아침에..."

  현관문을 나선 지 정확히 3분만에, 차원일은 윗층을 향해 헛기침을 한다. 엘리베이터는 아직도 14층에서 움직일 생각을 않는다. 욕이라도 해야하는 걸까, 순간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기 시작한다. 14층과 마주친 그는 눈을 흘기는 것으로 수인사를 대신한다. 오늘따라 층층마다 정지하는 엘리베이터. 차원일은 입이 바짝바짝 마르기 시작한다. 내리자마자 전쟁이겠다. 땡~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는 순간, 튀어나가려 했지만 제발에 걸려 넘어진다. 하지만 지금은 재수가 있다, 없다를 생각할 겨를조차 없다. 창피함을 느낄 시간도 없는 지금, 그런 생각은 사치일 뿐이다. 어느덧 그는 엘리베이터에서 모든 사람들을 추월했다. 점점 가속이 붙는다. 뛰는 모양이 또 위태위태하다. 하지만 더 이상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버스정류장에 가기 전까지는.

  그렇게 전력질주를 했건만 야속하게도 마을버스는 이미 떠나고 없다. 바로 택시를 잡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매일 같이 치르는 출근전쟁이 또 그렇게 마무리되어 간다. 밤 늦게 야근을 해도 예외 없는 근태관리를 하기 때문에 정시 퇴근한 다음날은 더더욱 긴장되기 마련이다. 다시 한번 차원일은 출근시간이 여유로운 회사를 생각한다. 낙원동에 있는 LH상사는 10시까지 출근한다고 하던데... 

  오후 1시 15분, 한껏 나른해질 시간이지만 차원일은 날아갈 듯 기쁘다. 정말 꿈은 이루어지는가 보다. 점심을 먹고 흡연실에 쭈구려 앉은 그에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 그것은 그를 구원할 메시아의 메신저였다. 헤드헌터라니, 게다가 LH상사의 오퍼였다. 차원일은 벌써부터 출근전쟁에서 해방된 기분을 만끽한다. 일하는 틈틈이 이력서를 만든다. 엉터리처럼 살아온 줄 알았는데 한 장으로 줄여놓은 삶이 뿌듯할 만큼 썩 훌륭하다. 이 정도면 되겠다 싶었지만 한번 더 이력서를 살펴본 후에야 메일을 발송한다. 평상 시 그에게선 찾아볼 수 없던 꼼꼼함이다.

  통쾌함이란 이런 것이다. 본부장실의 문이 쾅, 하고 닫혔다. 마지막 인사를 하고 난 차원일은 느긋하게 짐을 싼다. 평소 언제든 떠나겠다는 생각에 사무실에 개인 짐을 안 갖다 놓은 듯 했지만 대충 추려보니 3박스가 넘는 짐들이 나온다. 하긴 9년을 다닌 회사인데 그 정도의 흔적은 당연하다. 사무실 사람들과 작별 인사. 진부하고 형식적인 인사였지만 차원일의 감회는 남다르다. 이제야 그 지긋지긋한 출근전쟁에서 해방된 것이다. 만세, 라도 외치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참아내며 회사문을 나선다. 2주일간의 휴가는 이직의 덤이다. 쉬는 동안 그 동안 못 가졌던 아내와의 시간도 좀 즐길 수 있겠다. 자꾸만 웃음이 터져나온다. 과연 행복이란 이런 것이구나. 그는 이제 행복한 샐러리맨으로의 길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물론 과연 그러한지는 더 지켜봐야 할 일이다. 출근전쟁 말고도 전쟁거리는 늘 있는 곳이 세상이니 하는 말이다.



재미 없었더라도 쓰는데 1시간씩이나 투자한 정성을 봐서라도
원고료 적선 부탁要.

당근  양파   사과 






이글루스 가든 - 매일 매일 한 편의 글쓰기.

덧글

  • 불탄 2009/09/23 18:30 # 삭제 답글

    너무나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누구나 출근을 하면서 가지게 되는 이직에 대한 로망...
    멋지게 자리를 박차고 나간 동료들이나 실제 본인의 경우에 비쳐보더라도 떠나는 그 순간의 기쁨이었을 뿐 다 똑같더랍니다.
    이궁...
    오너가 되면 그것대로 머리털 빠지고, 월급 빌어먹으면 그것대로 머리에 쥐내리니...
    열심히 하지는 않았지만 열심히 해왔다고 믿고 저도 떠나고 싶습니다. 모 CF의 헤드카피처럼 말이죠.

    많이 응원하겠습니다. 다음 편을 기대하는 1인입니다.
  • 꽁트B 2009/09/23 23:15 #

    응원 감사합니다. 저는 불탄님의 다음 에세이를 기대하는 1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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